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종(고려 제3대) (문단 편집) ==== 광군 편성 ==== [include(틀:고려군의 편제)] [[최언위]]의 아들 최광윤은 [[유학]]을 갔다가 [[거란]]에게 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최광윤의 재능을 높게 산 거란은 그에게 벼슬을 주어 생활하게 했는데, 최광윤은 거란에서 일하던 중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려는 것을 알아차리고 몰래 편지를 보내와 조정에 알렸다. 이에 정종은 재위 2년([[947년]])에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하고 300,000명의 광군을 편성하여 병력을 모았다. 광군사는 명칭이 '''광군도감(光軍都監)'''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광군사'''로 돌아온다. 광군은 전쟁 수행만을 담당하는 국가의 [[상비군]]이 아닌 [[농민]]들로 이루어진 '''[[예비군]]'''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호족들이 통솔하는 지방군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어쩌면 그저 단순한 육체노동을 제공하는 '''노동 부대'''였다는 주장도 있다. 다시 말해 광군의 질은 병농을 함께하는 부병의 수준도 못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려의 지방 호족들은 그들 스스로가 강력한 전투 집단이었던 사실도 감안해야 한다. 당시 고려는 중앙 정부에서 통제하는 중앙군과 지방 호족들이 통제하는 사병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정종은 광군 편성을 통해 호족들의 사병을 중앙 정부의 통제 하에 두고자 했다. 광군의 편성은 산만한 군대의 지휘권을 통합해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으며, 이는 후대의 [[성종(고려)|성종]](제6대)이 경군(京軍)[* 임금이 직접 통솔하는 2군 6위]과 외군(外軍)[* 임금이 임명한 무관이 통솔하는 주현군(住縣軍)과 주진군(住鎭軍)]을 정해 군권을 통합하고 [[현종(고려)|현종]](제8대)이 광군을 주현군으로 통합시키는 것으로 드러난다.주현군은 노역만을 담당하는 1품, 2품, 3품군으로 편성되었다. 특히 2만 남짓한 1품군을 제외한 2품, 3품군은 조정의 통계에서도 빠져 성종부터 현종 시기에 이르기까지 광군의 인적자원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 강화 시도는 미완에 그쳤음을 짐작게 한다. 광군은 [[현종(고려)|현종]], [[문종(고려)|문종]](제11대) 대에도 '''사면 기광군(四面 奇光軍)''', '''유음 기광군(有蔭 奇光軍)'''이란 이름으로 크게 축소된 채 남아 있었는데, 광군이 호족들의 사병 출신이었기에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잔존한 광군은 '''기광군(奇光軍)'''이란 명칭으로 바뀌어 동•서•남•북 사면에 배치되었다. 그리하여 '''사면 기광군'''으로 불리는 특수 부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기광군은 호족의 사병이었기 때문에 특별 대우를 받아 음전(蔭田)을 조금씩 가졌다. 그래서 '''유음(음전이 있는) 기광군'''이라고도 불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